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스 라벨 (문단 편집) == 인간 관계 == *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 디아길레프]]: 라벨이 디아길레프의 요청으로 "라 발스"를 발레곡으로 작곡했을 당시, 디아길레프는 이 곡을 "발레곡이 아니라 발레를 표현한 곡"이라고 폄하하여 라벨은 굉장히 화가 났다고 한다. 그 이후 둘의 사이는 벌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디아길레프가 인사했는데 라벨이 무시했다는 이유로 결투할 뻔 했다고도. * [[클로드 드뷔시]]: 인상파 음악의 선배인 [[클로드 드뷔시]]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초반엔 그럭저럭 서로 선후배로서 높이 평가하는 사이였으나, 프랑스 음악계가 그 둘의 열광적인 추종자들로 갈라져 갈등을 벌이게 되자 자연스레 멀어진 듯. 거기에다 라벨은 본의 아니게 드뷔시의 아류라는 오해를 사고 있었는데[* 당대에는 라벨이 드뷔시를 표절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특히 드뷔시와 라벨의 현악 4중주를 비교해서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큰 오해다. 라벨의 초기 작품이 분명 어느정도 드뷔시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오히려 드뷔시가 라벨에게서 더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영상 1, 2집은 라벨의 물의 유희에서 영감을 받고 쓴 작품이다.] 예를 들면 "물의 유희"를 작곡했을 당시만 해도 드뷔시가 작곡한 피아노곡은 몇 곡 없었는데, 이후의 드뷔시 곡과 라벨의 곡을 비교해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꽤나 영향을 끼쳤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또한 드뷔시는 로마 대상 사건 때 라벨을 옹호해 주기도 했다. 라벨은 드뷔시를 존경하면서도 드뷔시를 비판하는 발언을 가끔씩 하긴 했으나,[*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에 대해 "만약 시간이 있다면 내가 '바다'를 다시 편곡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1918년에 드뷔시가 죽자 라벨은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소나타'를 지어 드뷔시에게 헌정했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와 인연을 맺은 예술가들로서 접점이 있었고, 스트라빈스키가 프랑스에서 갓 떠오르는 뉴비일 적부터 챙겨주어 그가 음악계의 거물로 성장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스트라빈스키는 정교한 음악적 기술을 가진 라벨에 대해 '스위스 시계장인'이라 평하며 존경을 표했으며, 그의 군 환송회부터 장례식까지 참석하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한편 디아길레프의 요청으로 라벨과 스트라빈스키가 공동으로 [[무소륵스키]]의 미완성 오페라 호반시나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담당하기도 했다. 라벨이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마브라'(1922)에 대해 혹평하면서 잠시 사이가 소원해진 적도 있었지만 라벨이 죽을 때까지 서로에 대한 존중은 잃지 않았다. 둘이 서로 친밀한 관계를 넘어 동성애적인 썸씽이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https://www.latimes.com/entertainment/arts/la-xpm-2013-jul-18-la-et-cm-stravinksy-craft-20130721-story.html|#]][* 이 주장을 하는 이가 다름 아닌 스트라빈스키 말년의 최측근이었던 로버트 크래프트라는 점에서 단순히 허위 주장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스트라빈스키는 양성애자였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로버트 크래프트가 자신이 가진 풍부한 스트라빈스키 관련 자료에 대해 침소봉대하여 해석한다는 비판도 많은 만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라벨과 스트라빈스키가 젊은 시절 잠자리도 같이 할 정도로 친밀했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사실인 듯하다.] *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1930년 5월 4일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뉴욕 필의 프랑스 공연에 라벨이 참석했다. 그 공연에서 토스카니니는 볼레로를 연주했는데, 라벨은 공연이 끝난 후 토스카니니의 템포가 너무 빠르고 피날레를 아첼레란도로 마무리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토스카니니는 자신이 설정한 템포가 곡에 더 적합하다고 고집을 굽히지 않았으며, 몇 달 후 라벨은 당대의 지휘자와 척을 져봤자 좋을 것 없다 생각했는지 자신의 신작인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지휘를 부탁하며 화해를 시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오히려 볼레로의 명성을 더 높여 주는 결과를 낳았다.[* [[http://en.wikipedia.org/wiki/Bol%C3%A9ro#Toscanini|#]] 그 후로도 토스카니니는 볼레로는 빠른 템포를 고수했는데 (오히려 더 빨라졌으면 빨라졌지...) 그의 볼레로 연주는 음반으로도 남아 있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느긋하게 연주하는 타 지휘자들의 연주에 비해 몇 분 이상 빠르다. (후대에는 더 빠르게 연주하는 사람들도 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